우주의 흔적들: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와 그 수용에 관한 단상

마리아 린드
힐마 아프 클린트, 〈타오르는 불꽃〉, 1930. 종이에 수채. 47 × 31 cm. 파이어스톰재단, 스톡홀롬 소장 및 제공

마리아 린드는 스톡홀름과 키루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 작가, 교육자이다. 2023년 이래로 키루나의 킨 현대미술관의 디렉터로 재직중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는 모스크바의 주러시아 스웨덴 대사관에서 문화부 카운슬러를 맡았다. 스톡홀름 텐스타 쿤스트할 디렉터(2011–2018), 제11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CCS Bard College 석사 프로그램 디렉터(2008–2010), 스톡홀름 laspis 디렉터(2005–07) 등을 역임했다. 1990년대 초부터 폭넓은 교육 활동을 이어왔으며, 오슬로의 국립예술아카데미에서 아티스틱 리서치 교수(2015–2018), 콘스트파크 큐레이터랩의 강사 등으로 활동했다.



연구명 우주의 흔적들: 힐마 아프 클린트의 회화와 그 수용에 관한 단상

분류 에세이

에디션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저자 마리아 린드



오늘날 힐마 아프 클린트를 대표하는 추상적이고 오컬트적인 이미지들은 그녀가 본 환시에서 비롯되었으나 정작 그녀 자신도 그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가까운 여성 친구들과 몇몇 협업자들을 비롯한 소수만이 이 그림들을 볼 수 있었고, 이후에는 그녀의 장미십자회·신지학·인지학적 신념을 공유하는 열성가들과, 젊은 해군 장교였던 그녀의 조카에게로 공개 범위가 확대되었다. 인지학회의 창립자이자 아프 클린트의 회화를 직접 경험하는 행운을 누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 작품들이 온전히 이해되려면 반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장할 수 있다면, 슈타이너의 예언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사후 20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추상 회화를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944년 세상을 떠난 뒤, 앞서 언급한 해군 장교 조카가 유일한 상속인으로서 이 유산을 보존하는 책임을 자처했다. 그는 1972년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을 설립했고,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을 소유하며 최근까지 작가가 남긴 유언과 원칙을 충실히 지켜왔다. 이후 신지학과 연을 맺고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미술사학자 오케 판트의 노력으로 아프 클린트의 작업은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출판되었으며, 여러 전시에서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건 《예술 속의 영성: 추상 회화 1890–1985》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의 에소테릭(비밀 종교)적 측면을 조망한 이 야심 찬 서베이 전시가 198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아프 클린트의 작업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존재가 모호했던 스톡홀름 출신의 여성 작가가 자신의 방대한 추상 회화 작업 세계를 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피에트 몬드리안 등 곁에서 소개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삼 년 후 《힐마 아프 클린트의 비밀에 부친 그림들》이 헬싱키에서 개막해 레이캬비크, 오슬로, 베르겐, 오덴세, 그리고 뉴욕으로 이어지는 순회전으로 확장되었고, 뉴욕 MoMA PS1에서는 117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곧이어 방대한 모노그래프가 출간되었으며,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회고전은 예테보리, 룬드, 오덴세에서 순회전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전시가 비엔나, 그라츠, 파사우를 순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대 초반, 뉴욕 드로잉 센터에서 개최된 그 유명한 힐마 아프 클린트, 엠마 쿤츠, 아그네스 마틴의 전시로 계속된다. 2005년에는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고, 이듬해 2006년에는 런던 캠든 아트 센터에서 또 다른 개인전이 개최되었다. 이와 같은 전시 이력을 볼 때, 아프 클린트의 전기 작가 율리아 포스가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이 2013년에야 아프 클린트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당시의 전시는 이미 그녀의 번째 대규모 개인전이었다). 또한 201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블록버스터 회고전이 있기 전까지 아프 클린트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는 통념과도 맞지 않는다. 작가가 살아 있다면—평생 제도권 미술계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작업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을 찾아 헤맸던—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선, 그녀의 그림들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아프 클린트는 거의 사십 년 동안 각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완성된 1,300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그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전에 제작된 그 어떤 추상 회화보다도 크다. 스톡홀름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의 아카데믹 화가로 훈련받고, 영적 수행에도 정통했던 그녀는 점차 목소리와 환시에 이끌리게 되었고, ‘신비’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작품들이 지드로, 아말리엘, 그레고르, 아난다와 같은 영적 존재들의 지도에 따라 완성되었다. 아프 클린트는 자신의 손을 이끄는 상위의 존재들, 즉 그녀가 ‘의뢰인’이라 부른 이들이 티베트에서 왔으며 영원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초월적 체험은 종종 기도와 단식을 수반했으며, 비가시적인 실체와 물질과 영혼의 연속성에 관한 깊은 신념 속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아프 클린트는 자신을 하나의 도구로 여겼다. 이것은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과 같은 예술가들과 대조적이다. 이들은 적어도 목적론적 미술사에 따르면, 추상화에 대한 보다 개인적이고 지성적이며 분석적인 접근 방식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네 작가 모두 당대의 오컬트적 경향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지만, 세 남성 작가는 형식적 실험을 통해 역사적 순간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을 주도하고자 했으며, 미술관, 박물관, 출판물 등 공적 영역에서 동시대 예술가들과 대화를 통해 시대의 흐름에 발을 맞추었다. 반면 아프 클린트에게 회화는 계시적인 행위 였다. 그녀는 거의 완전히 고립된 채 작업했으며, 소수의 영적 회화를 공개한 것은 단 두 차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신지학과 인지학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그 어떤 작품도 비평의 대상도 되지 않은 채, 그녀의 실천은 극소수의 지인을 제외하고 세상에 비밀로 남아있었다.

아프 클린트에 따르면, 그녀의 그림은 ‘불멸의 존재’를 표현한다 (오늘날에는 ‘환상 회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그림에서는 다양한 종교가 뒤섞여 생동감 넘치고, 복합적이며, 융합적인 우주를 보여주며, 기독교를 토대로 하면서도 자연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정교한 상징 체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둘로 나뉘어 평생 다른 반쪽을 찾아 헤매는 플라톤 철학의 원형적 양성 존재 개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 변주했다. 남성과 여성,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불완전한 두 반쪽은 상반된 것들의 필연적인 재결합과 이원성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드러내는 사례가 된다. 그녀의 그림에는 달팽이가 자주 등장하는데, 자웅동체인 이들은 문자 그대로 분열을 극복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태초의 혼돈〉, 〈열 점의 대형 그림〉, 〈원자〉, 〈파르지팔〉, 〈마하트마의 현재 입장〉, 〈로즈힙을 묵상하며〉, 〈신장(여성)〉 등의 그녀의 작품 제목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소개되는 작품 〈타오르는 불꽃〉(1930)은 관절염으로 인해 대형 작업이 어려워진 작가의 후기에 완성한 소규모 드로잉과 수채화 연작에 속한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영적 존재에게서 부여받은 과업을 완료한 상태였으며, 이전의 작품에서 드러났던 선들은 사라지고, 추상적 형상들은 흐릿해졌다. 이 회화는 말레비치나 몬드리안보다 터너와 모네에 더 가까웠다. 화면에는 노란 언덕 위로 보라색과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고,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는 태양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위에서 노란색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청보랏빛 심장은 언덕 안쪽, 거의 아래쪽에 자리한다. 기독교 도상학에서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성과 인류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성심 모티프를 연상시키는 이 심장은 땅속 깊이 박혀 있어 지구의 신성함을 암시한다. 이 신비로운 그림은 한때 엘사와 막다 예루드 자매가 소장하던 작품으로, 두 자매는 직물 예술가로 수련받고 스웨덴 남부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며 자신들의 작품을 판매했었다. 아프 클린트는 인지학회를 통해 이들과 친분을 맺고 이 그림을 선물했다. 두 자매가 세상을 떠난 뒤 이 그림이 1988년 경매에 출품되었고, 아프 클린트의 오컬트 작품 중 드물게 개인 소장품으로 남게 되었다.

엠마 쿤츠, 조지아나 하우튼, 아그네스 펠튼 등 영성주의 작가들 가운데서도,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 세계는 순수한 기하학과 추상적 표현 방식, 완전한 자연주의적 형상, 심지어 과학적 삽화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눈에 띄며, 〈타오르는 불꽃〉은 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그녀는 곡물과 다른 식물들을 연구했고, 그들의 추상적인 ‘아스트랄(천체적)’ 이상에 관한 연구도 지속했다. 1922년을 기점으로 그녀의 회화는 급격한 변화를 맞는데, 형태가 색채에서 비롯되며, 소수의 선만이 자연 연구에서 얻은 인상을 바탕으로 통합된 전체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어진 10년 동안 인간, 윤회, 아스트랄 세계로의 여행에 초점을 맞춘 유동적인 수채화 들이 등장했다. 그중 한 연작은 신장과 비장 등 인체 기관의 특징을 강조하기도 한다.

아프 클린트의 다면적인 작품 세계는 기독교 신앙을 근간으로, 오컬트, 영성주의, 신지학, 인지학 이론 및 실천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명상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종종 단어와 이미지를 결합해 하나의 영적 차원 안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구상적이든 추상적이든, 그녀의 이미지들은 다른 영역, 다른 현실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과 공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프 클린트는 주변 세계의 모습과 신성한 현실을 구분하는 표현 원칙을 따랐던 정교회 성화 화가들의 인식론적이고 방법론적인 고민을 공유했고, 비물질적 영역의 ‘타자성’ 이 강조되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양자 모두에서 뚜렷한 비자연주의적 형식이 나타난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은 또한 각 색채가 신적 속성과 구체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티베트의 기도 깃발과도 비교된다.

아프 클린트는 몇 년간 작업을 중단하는 시기가 있었음에도 일관된 회화적 지도를 구축하는 데 있어 놀라울 정도로 집요했다. 그녀의 작업 방식은 오늘날의 실천 기반 연구와 비교해 보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녀는 다양한 출처를 참조하고, 여러 수단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여러 기법 실험을 시도한 적도 있다. 그녀의 삶의 다른 특징들 역시 상당히 동시대적인데, 비혼을 선택하고 동성과 함께 살았으며, 동료 여성 작가들과 협업하여 때로는 한 캔버스 위에 공동 작업을 하였다.

나아가 아프 클린트는 우주론자들과 몇 가지 관점을 공유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점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었다.1 그녀는 윤회를 믿었다. 지상 생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은 당대의 급진적인 사상의 또 다른 공통된 측면이었고, 성별의 구분과 차이를 비롯해 이 모든 이원성을 초월하고자 하는 극복을 향한 열망과 기대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프 클린트와 우주론자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고, 심지어 사회주의자였으며, 자연과학과 그 새로운 발견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아프 클린트가 살던 당대의 러시아인들처럼, 그녀의 작업은 행성과 별들 사이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이 2010년대 주류 미술관에서 열린 두 차례의 블록버스터 전시를 통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이러한 미술 기관들이 대표하는 체계 안에서 그녀의 작품을 다루는 방식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발견’이라는 수사는 그녀의 작품이 지닌 심오한 정신에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작품의 본래 목적마저 왜곡한다. 아프 클린트는 생전에 자신의 회화 연작을 소장하는 나선형 ‘사원’을 구상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적절했다. 하지만 이것이 블록버스터 전시 이전에 이루어진 그녀의 유산에 대한 중요한 노력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아가, 작품을 유료로 전시하는 것 역시 문제적인데—이 작품들은 단순히 오락적 볼거리가 아니라 신앙적 대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가 기록적인 관객을 모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이 이전 전시들, 큐레이터들, 관람객들을 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아프 클린트는 1908년 자신의 작업실을 방문한 루돌프 슈타이너로부터 자신의 그림들이 시대를 앞서 있어 중요성을 깨닫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그로부터 원했던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생전 미술 시장이나 제도권 미술계에 지원을 구하거나 받지도 않았었다. 그녀는 몇몇 아방가르드 동료들을 알고 있었던 듯 보이지만(예를 들면, 스톡홀름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 건물에서 에드바르 뭉크의 전시가 열린 바 있다), 그 사회의 일원은 아니었다. 대신 아프 클린트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비주류’ 문화에 끌렸다.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영적 관심사와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일 정신적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공감을 보내줄 인지학자들을 찾아 자신의 그림들을 풀컬러 미니어처 모형으로 만든 ‘가방 속 미술관’을 들고 런던과 암스테르담으로 여행했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 세계가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것은 2010년대 블록버스터 전시와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이사진 교체 이후 시작되었다. 재단이 대부분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작가의 유언이 자신의 작품을 함께 보존할 것을 명시하고 있기에, 새로운 기업적·상업적 의제를 충족하는 다양한 판매용 상품이 고안되었다. 상당한 입장권 판매 수익과 더불어 출판물, 엽서, 포스터가 쏟아져 나온 것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으며, 일정 부분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수건, 머그컵, 베갯잇, 한정판 수제 카펫에 이르러서는 선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단순한 미적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영적 경험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2022년에는 디지털 아트 기업 어큐트 아트와 출판사 스톨페가 협력해 제작한 NFT가 경매에 부쳐졌는데, 두 기관 모두 새로운 재단 이사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아프 클린트가 생전에 직접 이사진으로 지명했던 인지학자들조차 그녀를 스톡홀름 남부에 위치한 인지학 센터의 재정적 구원자로 간주하며, 해당 부지에 힐마 아프 클린트 미술관 설립을 계획 중이다.

이로 인해 유족과 재단 이사진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고, 이는 곧 공개적인 논쟁으로 번졌다. 작가의 증조카이자 재단 이사장인 에릭 아프 클린트는 최근 이사회의 자체 정관을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규정에 따르면, 작품은 “영적 지식을 추구하거나 힐마 아프 클린트의 영적 원칙이 지향하는 사명을 완수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사람”2 에게만 공개되어야 한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아프 클린트의 작품 전시가 전면 축소될 수 있으며, 그녀의 작품에 대한 접근이 수많은 현대 미술 제도에 만연한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고 영적인 맥락에서 그림을 접하는 ‘영적 탐구자’에게만 국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법정 공방이 임박한 가운데, 만약 유족 측의 뜻이 관철된다면 앞으로 아프 클린트 작품의 유통 방식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조치가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해할 만하다. 유예 기간은 그녀의 작품 세계와 재단을 위한 최선의 방향을 모색하고 가늠해 볼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 재단 이사진에 의한 아프 클린트 유산의 부패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술계가 상업 논리에 잠식될 때 발생하는 폐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에 맞서는 에릭 아프 클린트의 저항은 시장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우리에게 고무적인 일이다.

아프 클린트 작품의 보존과 유통에 대한 성찰은 곧 이미지-창작의 본질과 예술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요구한다. 인간 의식과 도덕성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그녀의 작품을 살펴보고,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관객을 위해 비밀스럽게 제작된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질문 없이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고찰할 수 없다. 미술 시장을 넘어서는 위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정당하다. 하지만 주류 미술계라는 공적 영역에 참여하거나 혹은 그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보하는 것은 각각 어떤 의미를 갖는가?

브라이어니 퍼에 따르면, 아프 클린트는 자생적이며 자기 증식하는 황홀한 ‘영적 도해’ 체계를 구축했다.3 이들은 그녀가 알던 영적·사회적·정치적 상태를 넘어서는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지향했지만, 세속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인간 조건은 소비와 이윤 추구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진 영적 차원을 지닌다. 슈타이너가 아프 클린트의 그림 앞에서 우주의 흔적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프 클린트가 이 세상에서 예술을 다르게 창조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놀라운 유산을 우리에게 선사했다고 말하고 싶다.



  1. ‘우주론자’들은 19세기 말 혁명기의 러시아에서 등장한 지식인, 과학자, 예술가들의 느슨한 집단으로, 이들은 인류가 우주를 식민화하고 영생에 이르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실현하고자 했다.  

  2. Quoted in Jo Lawson-Tancred, “Is Hilma af Klint’s Legacy at Risk of Being Locked Away?” ArtNet News, March 10, 2025. 

  3. Briony Fer, “The Bigger Picture,” Frieze, September 30, 2013, frieze.com/article/bigger-picture-0. 


본 저작물은 2025년 10월 발간 예정인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5)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본 저작물은 저자의 동의 하에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웹사이트와 e-flux 저널에 선공개됩니다. 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와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2025 필자, 저작권자,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오늘
|
어제
|
스크린은 보호할 가치가 있습니다. 또는 스크린을 보호할 가치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