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독자: 왜 하필이면 발인가? 얼굴이나 손이 아닌 발의 형태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홍명섭: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보여지는’ 부분은 전체보다도 우선 인체의 부분적 형태(부위)로 먼저 다가온다. 예를 들면, 사람의 얼굴은 표정과 표현이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압도하는 부위이다. 거기에 비하면 ‘발의 표정’은 우리를 제압해 오는 인간중심적인 표정이 덜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손은 우리의 의지와 가장 가까운 능동적인 부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손의 기능은 쟁취적이고, 그 제스처는 민감하다. 거기에 비해 발은 보다 수동적으로 비유된다. 하지만 발은 대지와 교감하고 이어지는 신체적 통로가 된다. 땅의 가까이에서 대지의 음덕과 수평의 균형을 운영하는 뿌리인 셈인데, 그 역할에 비해 다른 어느 부위보다도 익명적이다. 따라서 인종, 숙명, 수난의 기관으로 비유될 수 있다. 또한 우리 전통에서 발의 연장인 신발은 죽음, 곧 대지로의 순환을 상징하며 존재와 부재를 이어준다. 삶을 떠나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신발이 놓이고, 물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다. 이것은 이승과의 하직을 고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사자밥 옆에도 신발을 놓는다. 따라서 우리 전통에는 신발을 선물하지 않는 것이 미신처럼 남아있다. 이처럼 신발은 실종과 상실의 기억이며 존재의 껍질, 부재와 이탈의 비유가 되어왔다. 나의 작가적 관심사인 탈바꿈, 껍질로 이탈과 순환, 존재와 부재 사이를 잇는 허물의 느낌은 손보다는 발 껍질에서 찾을 수 있다. - 홍명섭과 구독자의 인터뷰 중에서